치매의 돌부리에 옴팡 걸려 넘어진 당신은
반세기 넘도록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 얼굴이
아니, 애를 둘씩이나 달고도 언감생심
열아홉 꽃 처녀에게 장가들었던 잘난 남편인지,
엥간히도 속 썩이던 셋째 아들인지, 영 헷갈린다
두어 시간마다 용변을 보시게 하느라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일으키다 보면
팔남매를 키워 낸 젖무덤이 아직도 뭉클하다
변기에 앉히고 바지와 기저궈를 벗긴 뒤,
아주 오랜 옛날 내 귓바퀴를 간질여 주었을
쉬이- 쉬이-, 소리를 귀에 불어 넣는다
이윽고 빗방울 소리, 시냇물 흐를는 소리 멎고
휴지를 쥔 내 손이 신호등에 걸린 듯 멈칫, 한다
부엌에서 밥하는 아낼 부를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먼 산 바랭이처럼 아득한 천장이나 바라보며
어림짐작으로 질끈 뒷갈망을 끝낸다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잃어 버렸을 쑥스러움을
아직도 편히 넘기지 못하는 내 손의 겸연쩍음과
오래된 상처에서 흐르는 저 푸념 같은 당신의 노래
손장단 쳐가며 흔쾌히 맞장구치지 못하는 송구함을
언덕처럼 굽은 당신 등 뒤로 슬며시 숨겨 놓는다
이제 머언 먼 어린 날의 세계로 돌아간 당신에게
아직도 어둑시니 같이 깜깜한 쉰둥이 아들은
쉰 살이 되어서 겨우, 쉬 소리나 돌려드리고 있다
류지남 시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사곡중, 공주여중, 청양고, 정산고를 거쳐, 공주 마이스터고에서 여전히 푸르른 아이들과 함께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 1990년 『삶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충남작가회의, 충남교사문학회 벗들과 더불어 술벗 글벗으로 지내고 있다. 2001년 『내 몸의 봄』(내일을 여는 책)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고 15년 만에 『밥 꽃』(작은숲)을 발표했다. 공주 신풍 갓골이라는 시골 고향집에서 풀과 나무를 벗 삼아 살아가고 있다. 소를 키우는 형과 한집에 어우렁더우렁 살면서, 가끔씩 소똥을 치우기도 한다.
출처: 류지남 시집 『밥 꽃』 작은숲, 2016. 누리진
쉬, 소리를 돌려드리다
쉬, 소리를 돌려드리다 류지남 치매의 돌부리에 옴팡 걸려 넘어진 당신은 반세기 넘도록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 얼굴이 아니, 애를 둘씩이나 달고도 언감생심 열아홉 꽃 처녀에게 장가들었던 잘난 남편인지, 엥간히도 속 썩이던 셋째 아들인지, 영 헷갈린다 두어 시간마다 용변을 보시게 하느라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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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꽃
존재와 세계를 쓰다듬고 보듬는 류지남 시인미시적 일상에서 빛나는 타자를 노래하다공주마이스터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는 류지남 시인이 그의 두 번째 시집 『밥 꽃』을 작은숲에서 출간했다. 2001년 첫 시집 『내 몸의 봄』(내일은여는책) 이후 15년 만에 낸 이 시집의 발문을 쓴 김상천(문예평론가)은 그의 시를 ‘미시적 일상에서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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