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볼래유? 얼마 전 작은 엄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촌의 민방위교육 통지서를 들고 와서는 우천시가 어디에 있는 도시여? 부천시도 아니고 우천시 종합운동장으로 오라는디, 어떻게 찾아간다냐? 당최 알 수가 없어야
때마침 비가 내려 고속버스가 통과하는 곳마다 우천시입니다 문득 광수 씨의 휴대폰 벨이 울립니다 여보세요, 섬이라고? 뭘 하고 있는데? 보길도와 윤선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알았어 잘 다녀와 통화를 끝낸 광수 씨가 뜬금없이 묻습니다 보길도는 알겠는데 윤선도는 어디에 있는 섬 이름인가유?
윤선도는 조선 시대에 하나의 섬으로 떠돌다 갔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는 일 다만, 광수 씨 입안에서 보길도도 젖고 윤선도도 젖고 있다는 사실 외엔…… 윤선도가 푸득거리는 시간이라는 놈을 낚아챘는지 그 선홍색 아가미를 들춰 보았는지 궁금한데, 다시 한 웅큼의 말이 비늘처럼 쏟아집니다 요새 입에서 누항사라는 단어가 계속 맴도는데, 누항사라는 절에 가 본 적 있남유?
누항에 비 내리고 누항사도 젖습니다 가난한 선비가 소를 빌리러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내용을 담은 박인로의 가사 제목이라고 대답한다면 참 갑갑한 사람이겠지요 그 선비는 끝내 소를 빌리지 못했지만 중생이 사는 곳인 누항이야말로 절이 있어야 할 곳이라 역시 광수 씨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내 안의 소는 목이 마른지 연신 혀를 내두릅니다 풀리지 않는 갈증입니다 저 멀리 입장휴게소 입간판이 보입니다 광수 씨의 말을 흉내 내어 내가 묻습니다 그럼 저 입장은 무슨 입장이래요? 그가 점잖게 응수합니다 입장 곤란하니 물어보지 마세유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장안문을 머리에 이고」 외 4편으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이 있다.
출처: 박설희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실천문학사(2008), 누리진
우천시 누항사
우천시 누항사 박설희 내 말 좀 들어볼래유? 얼마 전 작은 엄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촌의 민방위교육 통지서를 들고 와서는 우천시가 어디에 있는 도시여? 부천시도 아니고 우천시 종합운동장으로 오라는디, 어떻게 찾아간다냐? 당최 알 수가 없어야 때마침 비가 내려 고속버스가 통과하는 곳마다 우천시입니다 문득 광수 씨의 휴대폰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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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소통 부재의 현실에 조용한 울림을 전하는 박설희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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