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밑이 썩고 있다 그 마을의 모든 말들은 진실을 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늙어가는 얼굴을 억지로 잡아당기기 위해 주사기로 얼굴에 실을 집어넣거나 혀짜래기 발음으로 거짓말 밖에 할 줄 모르는 그 마을 여촌장이 썩고 있는 물에 자꾸 침을 뱉고 있다 늪이 창궐하고 있다 여기 저기에서 눈에 탐욕의 불을 밝힌 두꺼비들이 뛰어다닌다 철학은 이미 오래 전에 망가졌다 여촌장은 변기를 열심히 갈아대지만 정작 악취는 자신의 썩은 영혼에서 풍겨나오는 것을 모른다 그 해 겨울 내내 몇 달씩이나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힘들게 희망을 발명했다 그 마을에서 희망은 발견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두꺼비들이 다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을 발명해 내야만 했다
여촌장은 아직도 거짓말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거짓이 그 마을을 썩게 만든 가장 큰 독인 것을 여전히 모른다 사…실 그녀는 수십 년을 그렇게 거짓말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짓으로 옷을 해입고 거짓으로 얼굴에 주사를 놓고 거짓으로 밥을 먹고 거짓으로 목욕을 한다 거짓이 그녀의 생존방식이다
죽은 어린 왕들은 멀리에서 슬픈 눈으로 거짓으로 뒤덮인 그 마을을 지켜본다 그 눈길이 슬프고 막막하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봄이 오면 조금이라도 마을이 밝아질지도 모른다고 속삭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다 봄이 오면 절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서 겨우내 지핀 촛불이 수직으로 타오르고 있다
김정란 시인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에는 연극에 심취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기독교방송국 및 에어 프랑스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르노블대학을 졸업하였다.
1976년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또한 '현대시세계'에 평론 「이성복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의 활동도 시작하였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 정신의 폭을 넓혀온 시인이다. 또한 `거품`이라고 이름붙인 문화 상업주의, 잡탕주의의 허실을 깐깐하게 헤집어내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시체의 말을 쓰는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정의하며, 시를 쓰는 작업은 `때론 엄청난 외로움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그 외로움이 바로 `시인의 밥이며 자부심`이라고 고백한다.
시집으로는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되돌아보네❯, ❮스타카토 내 영혼❯, 그리고 위승희와의 공동시집인 ❮사이렌 사이키❯가 있다. 산문집으로는 사회문화 에세이인 ❮거품 아래로 깊이❯가 있고, ❮상징 기호 표지❯, ❮사랑의 이해❯, ❮람세스❯, ❮시간의 지배자❯ 등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사랑으로 나는」이라는 시로 2000년 제14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누리진, 사진: 한겨레신문 김봉규 선임기자
(제목 없음)
<그해 겨우울, 길고 긴…..> 김정란 발 밑이 썩고 있다 그 마을의 모든 말들은 진실을 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늙어가는 얼굴을 억지로 잡아당기기 위해 주사기로 얼굴에 실을 집어넣거나 혀짜래기 발음으로 거짓말 밖에 할 줄 모르는 그 마을 여촌장이 썩고 있는 물에 자꾸 침을 뱉고 있다 늪이 창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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