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 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등이 있다.
출처 :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