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동 안동네 벽화 마을에서
처음 만난 나팔꽃
꽃은 벽화를 따라 가다가 멈춰 서서
둥근 잎을 벌리며 물방울을 밀어 내고 있다
목이 긴 산 45번지 일대의 골목은
항아리 너머로 빼곡하게 들어 찬 아파트를 굽어보았고
공터에 내다 버린 폐기물들은 금간 틈새로
깊숙이 묻어 둔 전쟁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붕 위 폐타이어 속에서 졸고 있던 어린 고양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눈을 반짝인다
나팔꽃들이 불어낸 수많은 희망들이 마른꽃잎이 되어 풀썩 거리고
얼기설기 걸려있던 빨래들이 제 그림자를 버리는 오후 4시
반짝이다 눈물이 될 것들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빛과 그늘의 경계를 비집고 나팔꽃 군단들이 떠났다
모두가 가버린 텅 빈 저녁 골목,
흩뿌려 놓은 실향의 노래가 창문틀을 타고 올라가
문 너머 가난한 발들의 귀를 적셔 주고 있었다
*문현동 : 과거 부산의 사립문 역할을 하던 곳이며 ‘문 너머’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윤 시인
2010년 창조문학신문 시 부문 당선. 김해 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밀양문학회 활동 중이며 '가야 문화예술진흥회'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출처: 누리진
문 너머 나팔꽃
문 너머 나팔꽃 이윤 문현동 안동네 벽화 마을에서 처음 만난 나팔꽃 꽃은 벽화를 따라 가다가 멈춰 서서 둥근 잎을 벌리며 물방울을 밀어 내고 있다 목이 긴 산 45번지 일대의 골목은 항아리 너머로 빼곡하게 들어 찬 아파트를 굽어보았고 공터에 내다 버린 폐기물들은 금간 틈새로 깊숙이 묻어 둔 전쟁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붕 위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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