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가난한 지갑에서 털려나간 이잣돈을 먹고
저렇듯 눈부시게 살쪄간다
네거리 금방석 노른자위 땅마다
겁나게 치솟는 빌딩군
돈놀음의 복마전
은행
보험회사
증권거래소
서울의 소공동에서
동경의 마루노우찌丸之內에서
뉴욕의 월가街에서
그 돈 창구 앞에 10분만 서 보라
헐레벌떡 줄을 잇는 이잣돈의 장사진
우리 지하철 이자만도 하루 자그만치 10억이라
네가 창백한 시구詩句 놀이를 일삼을 때
거대한 황금 아가리는
너를 통째로 삼켜 간다
그러께 겨울은
『논형論衡』을 번역하며
‘오늘 몇 장 했지? 몇 장을 더 써야 이 달 이자를 물지?
숨찬 강박감에 목 졸려
지난 겨울은
『시인의 고향』을 쓰고
‘이게 빨리 책으로 나와야 이자도 내고 원금도 좀 끌 텐데······’
애태움으로 지냈다
아내는 당장 저녁쌀이 없더라도
“이자만은 내야 한다”고 한숨이다
목구멍에 가시가 돋칠 뿐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땟거리가 없어도 이자를 내야 한다’
이 눈물겨운 몰아의 미덕은 오랜 조상 때부터 물려받아 내려오는 이 땅 가난한 백성들의 피할 수 없었던 운명
이자는 가난의 올가미
그 올가미를 스스로 달게 받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대를 이은
굴종의 역사
이잣날은 원금날은 바작바작
공룡의 아가리
목이 짓눌리고 피가 마른다
고희에 수입도 빚낼 자리도 없어
자, 어찌 할 건가
지쳐 죽을 건가
이를 악물고 살 건가
꼭 백 번쯤 되살아 남아
이윤 계산에 빈틈없는
국제자본 너 요술궁宮을 조준해
내 배고픈 시는 돌진하리라
이기형 시인
1917년 11월 10일(음력 9월 26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를 수학했다. 아호는 여민與民.
1943년 해방 직전까지 '지하협동단사건', '학병거부사건' 둥 항일투쟁 혐의로 수차례 피검되어 약 1년 동안 복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때 ⟨동신일보⟩ ⟨중외신보⟩ 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1947년 ⟨민주조선⟩에 최초로 시를 발표했다. 1947년 7월에 정신적 지도자로 모시던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창작 및 사회활동을 중지했다.
1980년 3월 절필 33년 만에 시 창작을 재개하여 1982년 6월에 첫시집 『망향』을 간행하고, 1983년 무크 『실천문학』 제4권 ⟨삶과 노동과 문학⟩에 「파문」 「단풍」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89년 '시집 『지리산』 사건에'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1999년 '사월혁명상'을 수상했다.
등단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한국문학평화포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등의 '고문'과 바른정치실현연대의 '상임공동대표'로서 문단과 재야에서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2013년 6월 12일 타계한 후 ⟨민족시인 이기형 선생 통일애국장⟩이 치러졌다.
시집으로 『망향』 『설제雪祭』 『삼천리 통일공화국』 『별꿈』 『산하단심山河丹心』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해연이 날아온다』 『절정의 노래』 등이 있으며, 실록 연작시집으로 『지리산』, 서사시집으로 『꽃섬』이 있다. 전기 및 평전으로 『몽양 여운형』 『여운형 평전』 등이 있다.
출처: 임헌영.맹문재 엮음. 『이기형 대표시 선집』 도서출판 작가, 2014. 누리진
이자와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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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대표시 선집
살아생전에 이기형 시인은 10권의 시집 출간을 통해 5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유작시 등 총 600여 편의 시를 창작했다. 서정시에서부터 서사시 그리고 연작시, 장시 등의 형식으로 제제, 이미지, 시어 등에서 새로움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한 시장 구조 속에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분단극복과 통일문제를 심화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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