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 이진희
2019.11.01
수첩과 일기를 불사르고 친구들에게서 온 모든 편지를 태우고 부모에게도 애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국했다는 얘기를 너의 입술로 들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잊지 않으려고 친구들의 얼굴과 전화번호를 머릿속에만 새기고 새기면서 밤을 또 낮을 견뎠지 떠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못 돌아갈 각오는 했지만 그때에도 나는 말 못했다 정확한 주소지도 모르면서 얼핏 들은 짐작으로 네가 살았다던 네가 없는 동네를 찾아가 때때로 배회했었다는 것을 네가 드나들던 대문은 파란색일까 초록색일까 넝쿨장미 점점이 늘어진 저기 어디쯤이 네가 고개 내밀어 바깥의 기미를 살피던 담장일까 끝까지 말 안 하길 잘했다 너를 찾으려고 씩씩하게 배낭을 꾸렸던 이제는 너의 아내인 너의 애인과 오랜 친구처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