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판이 벌어진 날은
산동네 개들도 배를 채우러 오는 집
임경업 장군과 미륵 동자가 한방에 사는 집
이끼 낀 슬레이트 지붕엔
단풍잎 몇 장이 무당개구리처럼 붙어있고
굿판이 끝나면
흰 쌀밥과 돼지고기와 과일과 떡을 세 들어 사는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갖다 줘서
나와 동생들이 해마다 한 뼘씩 키가 자라던 집
굿 없는 날은
징소리 고이던 처마에 무당거미가 그늘을 흔들며 집을 짓고
아기 귀신을 잘 본다는 주인집 무당 할머니가
머리에 무명 띠를 두르고
수국이 핀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매운 담배를 피우던 집
그 모습 문구멍으로 엿보다가
무당이 작두 탈 때는
머리가 천정까지 닿는다는 어머니 말이 문득 생각나
무당벌레의 몸을 빌려
그의 흰 버선발에 앉아보고 싶던 집
중학교에 올라와 처음 배운 영어 때문인가
붉은 대문에 또박또박 쓰인
굿. 하. 는. 집. 이
좋은 일 하는 집으로 자꾸 해석되던
새벽 장사 나간 아버지 어머니를 밤늦도록 기다리다가
우리끼리 깜박 잠들어도 하나도 안 무섭던
산기슭
우리 집
임경묵 시인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에서 자랐다.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출처 :《시와문화》(2016, 여름호). 누리진
굿하는 집
굿하는 집 임경묵 굿판이 벌어진 날은 산동네 개들도 배를 채우러 오는 집 임경업 장군과 미륵 동자가 한방에 사는 집 이끼 낀 슬레이트 지붕엔 단풍잎 몇 장이 무당개구리처럼 붙어있고 굿판이 끝나면 흰 쌀밥과 돼지고기와 과일과 떡을 세 들어 사는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갖다 줘서 나와 동생들이 해마다 한 뼘씩 키가 자라던 집 &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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