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淸明) 지나 무논에 안개가 짙어진다
안개는 무논을 박차고
홰를 치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기센데
죽은 족제비 한 마리가 무논을 천천히 부풀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랜 육식의 습관을 버리겠다는
일종의 침례
족제비는 건너편 숲에서 나고 자라서
몸뚱어리가 무논을 빠져나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뾰족한 주둥이를 무논에 처박은 채
첫물과 끝물이 만나는
점액질의 물꼬를 천천히 벌리고 있다
어엿하게 자란 영혼은
무논을 가볍게 빠져나와
다시 물안개나 천둥의 질료가 될 테지만
긴 도랑을 가로질러 물 첨벙 달아나도 좋으리라
죽은 족제비는 꼬리를 물속에 완전히 담그고
무논을 떠돌며
이제부터 초식의 시간을 가질 모양이다
무논은 물꼬를 최대한 오므리고
죽은 족제비를 꼬리부터 조금씩 녹여 먹을 모양이다
곡우(穀雨) 무렵까지
육식의 습관을 지닐 모양이다
임경묵 시인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에서 자랐다.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출처: 누리진
족제비 영혼 꺼내기
족제비 영혼 꺼내기 임경묵 청명(淸明) 지나 무논에 안개가 짙어진다 안개는 무논을 박차고 홰를 치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기센데 죽은 족제비 한 마리가 무논을 천천히 부풀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랜 육식의 습관을 버리겠다는 일종의 침례 족제비는 건너편 숲에서 나고 자라서 몸뚱어리가 무논을 빠져나가는 데 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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