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어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각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을 당신이 보여줄 때
그 분홍문장으로 반짝거렸던 내 말과
흥얼거리던 내 노래을 잃고 입술을 닫은 나에게도
뭔가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오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다 지나가서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문장에 엎질러진 먹물,
당신은 몇 겹의 무늬로 오는가
이 밤은 또 몇 겹의 무늬로 깊어지는가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문장만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문장을 탁본한다
강미정 시인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월간 《시문학》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 《물속 마을》, 《상처가 스민다는 것》,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등을 발표 했다. 현재 경주에서 시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출처: 계간 『신생』2016년 봄호 발표. 누리진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강미정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어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각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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