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밥
“워쪈다냐, 구들장에 누워설랑
공밥 먹어서 워쩐다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가마니때기 같은 노점을 깔아놓고
푼돈을 챙기던 어머니,
점포 한나 차리는 것이
두고 온 고향 땅 청산 같은 꿈이더니
온몸에 얼음이 들어 쓰러지고
“어린것이 벌면 을맨 벌것다고
······원 시상에, 부모 원망이 산 같것구나.
호랑이가 물어가도 션찮을 세상······
어서 일어나야지
나가설랑 한 푼이라도 벌어야 살지.”
어머니가 부르는 누이동생은
열두 살짜리 봉제공장 시다였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생각하며
책상 위에 엎드려
몇 번이나 속울음을 삼켰을지 모른다.
“돈을 벌어야 한다.
이따위 공부 같은 것
내 분수에 맞지 않아.”
나를 가르친 것은
링컨의 이야기가 아니다
멋진 신세계가 아니다
나를 가르친 것은 가위질에 부르튼 누이의 굵은 손목이다.
누이의 일기
눈발이 쏟아지는 늦은 퇴근길이다. 늘 그러려니 생각하지만, 그래도 털보집을 지나칠 때면 초조하고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나저제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며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나는지 양순이 아버지와 떠들어대고 있다. 또 외상술이겠지. 아버지는 왜 저럴까. 집안 사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하기는 한겨울이라서 일판에 나가 질통을 멜 수도 없고, 마음이 간다 해도 빈손으로는 어머니 약값 한 푼 보탤 수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언덕바지를 오르면서 세돌이네 집에선가 악에 받친 소리들이 터져나오는 것을 들었다. 죽일년 살릴 년······ 나가, 내가 왜 나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술에 취해 게걸음으로 와도 큰소리치는 일이 없는 아버지, 고향 땅에 돌아가야 한다고 가슴을 치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 외상술 그만 마셔요.
내 일당이 천이백 원이라구요
눈물이 주르르 나왔다.
.
가야 할 곳
1
“희망을 잃지 마라. 할 일이 있을 거다.”
먼 하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선생님, 희망이란
판자촌 배고픈 우리들이
돈과 바꾸기 위해 줍는
헌 병이나 고철 쪼가리 같은 건가요?”
중학교 삼 년 중퇴······
······무슨 힘이 내 등을 떠밀었던 것일까.
내가 성장한 노동자가 되어
다시 책장을 넘기며
내 어린 날의 아픔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없는 집의 자식들이
어떻게 해서 교육으로부터 잡초처럼 버려지는 것인지
깨우치고 더 큰 속울음을 쏟았지만,
그날 어린 마음의 노여움도 막연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노동자의 가장 큰 스승은 미칠 듯한 현실이니까.
학교에 입학하던 날
반평생의 주름살이 다 펴지는 듯이 환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섭아, 내 자식아
우리 집안서는 늬가 첨으로 중핵교, 댕기는 거여.
같잖은 동서기 같은 건
개꿈보담도 값 안 나가는 것이니께 넘에게 주고
널랑은 말여, 큰사람으로 일어나야 되는 거여.”
.
2
내가 먹은 것은 실밥과 먼지
내 나이 열두 살인데
키는 자라지 않고
아, 어떻게 하나
쉬지 못하는 종아리는
굵은 무다리가 되고
쉬지 못하는 손목은
벽돌같이 되었네.
아, 내 나이 열두 살인데
“이제부터 내가 돈을 벌겠어.”
“못 배우면 돈도 생기지 않아.”
“공장에 들어가겠어.”
“오빠는 엉터리야, 학교에 댕겨야 돼.”
“눈물 짜지 마.
네 몸을 팔아 하는 공부 죽기보다 싫어.”
내가 무엇이 되어야
찌든 우리 집 식구들
곰배손이 퍼지나
목마른 돈이 생기나
“어릴 때 어머니 잔등에 업혀 보았던 것들이 아직도 생생해.”
“과일 행상 하던 때?”
“단속반원들에게 채어 어머니는 길바닥에 엎어지고
과일들은 쏟아져 뒹굴고,
어머니 등을 치며 비명을 질렀지.
어머니가 뭐랬는지 알아?”
가난은 세상을 가르쳐준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가장 고통스럽게 진실을 가르쳐준다.
“워떤 놈들이 시키데?
이놈들아, 먹고살자고 허는 사람 일을
이토록 잡아뭉개고도
느이놈들 세월이 오래갈 것 같으냐.
주린 백성들 목구멍이 얼매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러냐.
내 죽어서도 못 잊는다, 이 짐승들아.”
박영근 시인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남.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84년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출간. 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 출간. 1987년 두 번째 시집 『대열』 출간. 1993년 세 번째 시집 『김미순전』 출간.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1997년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출간. 2002년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출간.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음. 2004년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 출간. 2006년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타계. 2007년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출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등에서 활동했으며, 『예감』 『내일을 여는 작가』 『시평詩評』 등 잡지의 편집위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 부회장, 인천민예총 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등을 지냄.
출처: 박영근전집 간행위원회 엮음『박영근 전집1』실천문학사, 2016. 누리진
희망
희망 박영근 공밥 “워쪈다냐, 구들장에 누워설랑 공밥 먹어서 워쩐다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가마니때기 같은 노점을 깔아놓고 푼돈을 챙기던 어머니, 점포 한나 차리는 것이 두고 온 고향 땅 청산 같은 꿈이더니 온몸에 얼음이 들어 쓰러지고 “어린것이 벌면 을맨 벌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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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전집. 1: 시
[박영근 전집. 1: 시]에는 시인이 생전 펴낸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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