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번이라니, 그대에게 내가,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니, 태초라니, 한없이 둥글어져 한생 먹이는 무덤이라니, 당신이 있는 힘껏 모아쥔 손가락이 빚어낸 최초의 손짓일 수 있다니, 모든 것의 처음인 동시에 가장 비루한 소멸인, 세기 위해 열 손가락 모두를 부러트려야 닿을 수 있는 먼 나라에······ 어지러이 0의 궤도를 따라 돌고 또 돌던 밤
어느 시인이 말이야, 자기가 죽으면 몸을 둥글게 말아 머리카락을 발가락 끝에 묶고 둥근 관에 넣어 장사 지내달라고 했대······ 시인이고 싶었던 당신은, 깊은 밤 궤도를 돌던 내가 꾹 누를 수 있는 하나의 단축버튼이고 싶던 당신은 이제 조금씩 작아진다 둥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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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끝자락과 발끝이 만나 비로소 생전에 다하지 못했던 핏기운 돌고, 점점 움츠러들고 축축해지며 다시 태아로 돌아가려는 것인데, 0번 속에 묻은 당신을 가만 쓰담아보면 선연히 떠오르는 둥그런 관의 기억 매시간 죽음을 살며, 다시 태어나는 준비를 하며, 당신은 그렇게 살아온 모양이다 그래서 당신이 어둠만큼의 질량과 빛만큼의 눈물어린 부피를 가지게 된 모양이다
0번을 눌러 당신을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 그대가 깃든관이 내 눈 앞에 나타날 것 같다 둥그런 당신 관에 들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손가락을 빨고 있을 당신에게 젖을 물려줘야지 당신이 다시 태어나는 날, 세상에 스며든 나도 함께 울음 터트리며 마지막 숨을 쉬는 그런 날이, 모르긴 몰라도 오기는 오겠지
이혜미 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을 받았다. 2011년 시집 『보라의 바깥』을 발표했다.
출처: 이혜미 시집 『보라의 바깥』 창비시선335, 2011. 누리진
0번
0번 이혜미 0번이라니, 그대에게 내가,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니, 태초라니, 한없이 둥글어져 한생 먹이는 무덤이라니, 당신이 있는 힘껏 모아쥔 손가락이 빚어낸 최초의 손짓일 수 있다니, 모든 것의 처음인 동시에 가장 비루한 소멸인, 세기 위해 열 손가락 모두를 부러트려야 닿을 수 있는 먼 나라에······ 어지러이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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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바깥
이혜미 시인의 첫 번째 시집『보라의 바깥』.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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