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가령 눈산이 있다고 치자
도시 한복판에 만년설의 눈산이 있어
석양 무렵이면 어디서나 흰분홍으로 빛나는 눈산이 보인다고 치자
종일 어두워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신기루처럼 허공에 우뚝 솟아 있는 흰 빛이 삼투하듯 몸 안에 들어와 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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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산에는 익살맞은 곰이 있어 산림감시 초소의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단숨에 들이켜고, 또 꺼내 단숨에 들이켜, 마침내 비틀비틀 눈 위에 발자국을 끌며 사라지고 뒤늦게 산림감시꾼이 그 뒤를 쫓다가 공범인 듯 발자국을 덮는 눈보라에 쫓겨 초소로 되돌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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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골짜기에 조난당한 이가 외투를 벗어 불을 피우고, 바지, 양말, 속옷 등을 차례로 벗어 태워버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지폐를 한 장씩 태울 때 그 어느 불꽃보다 환하고 강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스러지고 또 스러져, 기진맥진 정신을 잃을 찰나 구조된 후 지폐만큼 잘 타는 게 없더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린 아침, 그걸 읽은 사람들이 파악한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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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사슴 한 마리가 도로를 횡단하는 동안 차량들이 멈춰 서 길게 기다리고 귀가 쫑긋한 사슴은 그 초롱한 눈망울로 운전자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저녁 밥상에 일상으로 오르내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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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딘가로 떠나갈 때 작별인사는 가슴 속에 눈산을 그득 채우는 것 죽을 때까지 내려놓지 않을 만년설의 산 하나 품고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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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산이 우리에게 태어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맑은 숨소리가 새소리로 꽃으로 안개로 늘 피어오르는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장안문을 머리에 이고」 외 4편으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이 있다.
출처: 박설희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실천문학사(2008), 누리진
눈산
눈산 박설희 산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가령 눈산이 있다고 치자 도시 한복판에 만년설의 눈산이 있어 석양 무렵이면 어디서나 흰분홍으로 빛나는 눈산이 보인다고 치자 종일 어두워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신기루처럼 허공에 우뚝 솟아 있는 흰 빛이 삼투하듯 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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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소통 부재의 현실에 조용한 울림을 전하는 박설희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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