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원전후 654
마테는 어깨를 구부린 채 문워크 동작으로 부엌문을 통과한다 밀가루 반죽이 손금마다 고여 있다 빵을 구우면 보름달이 부풀어 기름에 미끄러지는 입술, 입술로 전해지고 얼굴 가득 손금 새겨진 어머니가 짧은 기별을 시식한다 문고리에서 달까지 세 발짝 거리
2. 발
날개 없는 새가 발 없는 새 위에 얹혀 서쪽으로 날아간다
모래가 모래 한 알에 얹혀 강물의 휘어짐을 바꾸듯
두 마리 새가 한 마리로 보일 때까지 펜 끝에 생각을 놓는다
생각 속 갱생원을 나와 생각 속 묽은 아메리카노 마신다
재생지는 재생지라 누렇다 재생지는 부활지가 아니다 갱생지도 환생지도 아니다 재생지는 재생지다 마테는 조금 반성하고 크게 뉘우치는 척하며 걷고 있다 재생지는 전생에 교과서였거나 플레이보이 잡지였다 선물상자였고 비방문서나 삐라였다
재생지는 재생을 원했을까 촛불이 꺼지면
불의 그림자는 어디로 갈까
생각은 우주를 감싼 우주 밖 우주
마테는 앞니로 껍질에 구멍을 낸다 발톱이 될 수도 있고 꽁지가 될 수도 있는 날계란 일부가 물큰하게 흘러내려 탁자 위 양푼 속으로 고여든다
계란의 구멍과 양푼 사이의 허공
흘러내리는 날계란 눈동자쯤에 우리 은하가 있다
.
3. 숲
나무들이 한데 모이면 종일 파도가 친다 청포도색 포말에 발 적시기가 무서운 새들이 종일 마테의 지붕 위를 맴돌았다 새들은 착륙하지 못하고 토네이도가 만들어지고 있어, 마테의 형이 새떼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형, 그쪽은 새들이 아냐 어머니야
아름답게 황홀해 나를 뛰어넘지
구겨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절단되지도 않아
불가사리처럼 창에 어린 이미지처럼
650 헤르츠쯤에서 파장을 그었다가 이네 되붙는
홀로그램, 잠깐 끊긴 파장에서 흘러나오던 뉴스와 음악
기억해, 물미역처럼 후르르 서 있던 방직공단 여공들을
항상 아름답게 황홀하지 내가 되고픈 어머니야 형, 홀로그램은
.
4. 여름과 무궁화의 짧은 통화
땅바닥에 침낭을 던지는 꽃 생리대처럼
돌돌 말려 먼 별 속으로 투신하는 꽃
침낭 속에서 뿔리를 만지는 노숙인과 마테가 마주보고 누웠다
목구멍에서 썩은 멸치떼가 솟구친다 고향이 어디라구요?
노숙인은 술병을 들어 먼 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당신 고향 말고 내 고향이 어디냐구요 노숙인은 다시 차표를 들어
별을 가리킨다 손을 내밀어 봐
술값으로 손금을 봐 주지 당신은 점성간가요?
노숙인은 차표로 마테의 손바닥에 금을 그었다
이제 가 봐 넌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 각다귀 들끊는 여름밤처럼
잊지 마 운명이 맘에 안 들면 손바닥에 금을 그어 그것이
두 개 세 개 잔가지를 칠 즈음엔 너도 나도 이 땅에 없겠지만
5. 타임머신 승차권을 줍다
마테는 밀가루와 선반에 화덕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흘러도 변함이 없이. 공간이동 부스에서 한 남자가 유쾌하게 녹아 간다 주먹만 한 혼불이 별을 행해 날아간다 검푸른 치마폭에 잔모래를 끼얹으면 거리의 모든 사람이 은하수 되는 곳, 사람은 별보다 크다고 믿는 백색왜성 키 작은 종족들, 혼불이 또 한 개 날아간다 뭇별은 일등성보다 아름다워, 어머니는 그 큰 눈에 진심을 담아 말하곤 했지 마테의 직업처럼 유전되는 어머니의 기억
밤의 커다란 창 앞에 선다 전신이 어리비치고 부엌 문턱에 노숙인의 차표가 덜어져 있다. 2084 타임머신 승차권, 마테는 수천 년 동행했던 몸을 침대에 눕히고 유리창에 어리비친 제 안으로 천천히 탑승한다
최세라 시인
서울 출생.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와반시』로 등단하고 시집 『복화술의 거리』를 발표했다.
2084, 타임머신 승차권을 줍다
2084, 타임머신 승차권을 줍다 최세라 1. 기원전후 654 마테는 어깨를 구부린 채 문워크 동작으로 부엌문을 통과한다 밀가루 반죽이 손금마다 고여 있다 빵을 구우면 보름달이 부풀어 기름에 미끄러지는 입술, 입술로 전해지고 얼굴 가득 손금 새겨진 어머니가 짧은 기별을 시식한다 문고리에서 달까지 세 발짝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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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의 거리
최세라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2011년 《시와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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