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번 | 이혜미
2019.11.01
0번이라니, 그대에게 내가,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라니, 태초라니, 한없이 둥글어져 한생 먹이는 무덤이라니, 당신이 있는 힘껏 모아쥔 손가락이 빚어낸 최초의 손짓일 수 있다니, 모든 것의 처음인 동시에 가장 비루한 소멸인, 세기 위해 열 손가락 모두를 부러트려야 닿을 수 있는 먼 나라에······ 어지러이 0의 궤도를 따라 돌고 또 돌던 밤 어느 시인이 말이야, 자기가 죽으면 몸을 둥글게 말아 머리카락을 발가락 끝에 묶고 둥근 관에 넣어 장사 지내달라고 했대······ 시인이고 싶었던 당신은, 깊은 밤 궤도를 돌던 내가 꾹 누를 수 있는 하나의 단축버튼이고 싶던 당신은 이제 조금씩 작아진다 둥글어진다 . 머리카락 끝자락과 발끝이 만나 비로소 생전에 다하지 못했던 핏기운 돌고, 점점 움츠러들고 축축해지며 다..